국내여행

지리산 벽송사(智異山 碧松寺)

경주ㅅгㄹ♪ 2009. 9. 7. 19:09

 

 

 

 

 

 

 

 

 

 

 

 

 

 

 

 

 

 

 

 

 

 

 

벽송사 목장승(碧松寺 木長丞)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2호

 

장승에는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있다. 장승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대 성기 숭배에서

나왔다거나 사찰 토지의 표지로 이용되었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또 목장승은 솟대에서, 석장승은

선돌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장승이 지방에 따라 벅수, 벅시, 법수,수살목,

당산할배 등으로 불렀다. 장승은 소속과 위치에 따라 마을을 경계, 성문,병영,해창,관로 등에

서 있는 공공장승 등이 있다. 벽송사 입구에 세워진 이 장승은 사찰에 들어오는 악귀의 퇴치,

사찰 경내에서 행해지는 불법 어로와 사냥의 금지, 풍수지리상의 비보(裨補)역할 등 다양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제작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략 일제시대 초기의 것이라고 전한다.

목장승은 노천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한다. 이곳의 왼쪽에 서 있는

금호장군(禁護將軍)은 역시 커다란 왕방울 눈 하나만을 빼고는 원래의 모습을 상당히 부분 잃어 버렸다.

그러나 호법대신(護法大神)인 오른쪽 장승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서 있다. 머리와 큰 눈,

큰 코, 일자형 입과 수염 등이  매우 인상적으로 조각 되어 있다. 무서운 것 같으면서도 순박하고,

위풍당당 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모습이라서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이 두 장승은 불교와

민간신앙이 어우러져 나타난 걸작 조형물이라 할 수 있다.

 

※비보 : 풍수지리상에서 나쁜 기운이 깃든 산천 등에 탑, 장승 등을 세워 나쁜 기운을 억누르고,

          약한 기운을 도와 보충 하는 것.

 

 

 

 ☞ 벽송사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벽송사는 조선 중종 시대인 1520년 벽송지엄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에서 보면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청허휴정(서산), 부휴선수,   송운유정(사명), 청매인오, 환성지안, 호암체정, 회암정혜, 경암응윤, 서룡상민 등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아울러 선교를 겸수한 대종장들은 108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을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부용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 혹은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포란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다.   고인이 "운거천상 별유천지, 부용정토 조인만대" 라는 말로 표현하였듯이 벽송사는 만고에 수려한 풍광 속에 위치하고있다.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선사는 태고보우, 벽계정심 선사로부터 내려오는 심인을 전해받아 조계정문의 정통조사가 되었다.선사는 "무자화두"에 의해 무명을 타파하고 선요에 의해 지해의 병을 떨쳐버렸으니, 간화선 수행법에 의해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은 조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된다. 그래서 벽송사는 간화선의 제일 조정으로서의 역사를 간직한 '한국선불교의 근본도량'이 되는 것이다.벽송대사의 뒤를 이어 벽송산문의 제2대 조사에 오른분이 부용영관선사이다. 부용선사는 도가 높고 학문이 깊어 배우러 오는 승속제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특히 영호남 일대에 부용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선비가 수 없이 많아 "전단향나무를 옮겨 심으니 다른 나무들도 향기가 난다" 라고 하는 말이 널리 유행하였다.부용영관 문하에 수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서산대사라 불리는 청허휴정과 부휴선수 이다.  서산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뒤 벽송산문의 제3대 조사가 되어 지리산 일대에서 행화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군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한국 선문의거장 청허휴정(서산대사)이 벽송조정의제3대 조사라는 사실은 벽송사 사적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서산대사 문하의 사명대사와 청매조사도 이곳 벽송사에서 오도하여 크게 불법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부용영관의 다른 한 사람의 수법제자인 부휴선수선사 또한 벽송사에서 도를 깨닫고 벽송산문의 조사가 되어 오랫동안 지리산에서 행화하였다.

   오늘날 한국불교 출가스님의 모두가 서산문파와 부휴문파에 속한다.

 

서산과 부휴 양대조사가 모두 벽송사 출신이라는 사실은 벽송사가 조선불교의 종가 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벽송사를 가리켜서, "조계조정, 벽송총림, 선교겸수, 간화도량"이라고 불렸다.

1704년 (숙종30년)에 환성지안 대사가 벽송사에 주석하여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때에 불당, 법당, 선당, 강당, 요사 등 30여동의 전각이 즐비하였으며, 상주하는 스님은 300여명에 이르렀고, 부속 암자는 10여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이로부터 금대암에 선원이 개설되어 수납자가 운집하고, 벽송사 본당에는 강원이 개설 되어 근세 일제 강점기까지 지속되었으니, 근 300년동안 조선불교 제일의 총림이 이루어져 선교겸수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이로부터 선교를 겸한 대종장들이 벽송사에 수선안거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게 되니, 강당을 거쳐 간 강주 스님 만도 약 100인이나 되니 학인과 납자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근대의 선지식이신 경허선사도 벽송사에 주석하며 서룡선사 행적기를 집필하였다.

  특히 벽송사 강원의 마지막 강주를 역임한 초월동조 대사는 일제 강점기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옥고를 치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인해 400여년간 지속되어 온 한국불교 최고의 조정인 벽송사의 사세도 기울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지리산 빨치산들의 암약(당시 벽송사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됨)으로 말미암아 국군에 의해 방화되어 완전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구한원응 대사의 원력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눈푸른 납자들이 수선정진 할 수 있는 선찰종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벽송사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3층 석탑(보물 제474호)과 경남 유형문화재인 벽송선사진영, 경암집 책판, 묘법 연화경 책판과 경남 민속자료 제2호인 목장승 등의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특히 목장승은 변광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들어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선방 뒤 탑전앞에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서있는 "도인송" 과 "미인송" 의 전설 또한 유명하다. 예로부터 목장승에 기원하면 애정이 돈독해지고, 도인송의 기운울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며,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벽송사 선방에서 도인이 유래없이 많이나와서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고 한다.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인 벽송사를 참배하여 묵은 업장을 소멸하고 청복을 닦아 성불인연을 가꾸어 보자.아울러 벽송사 목장승과 도인송, 미인송의 기운을 받아 건강과 소원을 성취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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