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芬皇寺)
분황사 약사여래입상(芬皇寺 藥師如來立像)
이 불상은 보광전(寶光殿)에 모셔져 있으며 왼손에 들고 있는 건칠제 약그릇(乾漆製 藥盒)의
뚜껑 안쪽에 "건륭삼십구년을미사월이십오일조성야"(乾隆三十九年乙未四月二十五日造成也)라는
붉은 글씨가 남아 있어 조선 영조(英祖) 50년(1774)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낮은 상투 모양이 표현된 머리에는 석회를 뭉쳐 만든 나선형 머리카락을
부착하였으며,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처리하여 장대한 신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의 사이에는 화형으로 접고 띠를 두른 군의가 U자형으로 층단을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무릎 밑에 이르러 3단으로 접혀있다. 대좌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판석으로 대신하고,
불상 앞에 놓인 석제 불단은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탑신석(塔身石)을
받침으로 삼고 있다. 이 불상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제작연대가 확실하여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분황사 석정(芬皇寺 石井)
이 것은 호국룡변어정(護國龍變魚井)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내부는 원형인데 어것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원융의 진리를,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제(四聖諦)를 뜻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원성왕(元聖王)11년 (795)에 당(唐)나라의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본국으로 떠났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河西國)사람들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
팔각정(八角井)에 사는 호곡용을 주문을 외워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나무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며 다시 살게 하였다.는 전설이있다.
분황사 화쟁국사비부(芬皇寺 國師碑趺)
이 비부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원효대사(元曉大師)비의 받침돌이다.
비석은 고려 숙종(肅宗)6년(1101)8월에 내린 조서에 의해 분황사에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諡號)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하였다. 현재 비는 없어지고 비편만 가끔씩 발견되고 있다.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가 비신을 받혔던 비대를 경내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 하였다.
현재 비대석에는 "차신라화쟁국사비적"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있다.
비대는 직육면체 이고, 상면에는 비신을 삽입하는 직사각형의 홈이 파져 있다.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912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 하고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절이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나지는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좌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역사가 오랜 분황사에는 허다한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 만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들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출토된 불상들이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